안녕하세요, 리안입니다.
안녕하세요, 에디터 토마토입니다. 드디어 첫 메일이에요! 이번 호의 주제는 '가족' 입니다.
다섯 명의 에디터가 떠올린 다양한 이야기를 지면에 담아 두었습니다.
너무 짧아서 아쉽고 더 보고 싶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리안>이 보내는 메일에 '더보기'는 공란으로 보내 드립니다.🥺
메일의 뒷이야기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상상한 후, 덧붙이고 싶은 말은 저희에게도 알려주세요!
점점 여름이 다가오는 오월에 우리가 만나게 되어 기뻐요. 다정한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며, 잘 부탁드립니다!
2023.05.12 no.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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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家族, 집에 함께 사는 사람을 흔히 ‘가족’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나는 가족이란 말을 들을 때면 항상 이런 불경스러운 말부터 떠올리게 된다.
가족은 떨어져 살아야 가족이다.
어원에서 한참 벗어난 말이지만,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도 한 이 말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가족의 묘한 관계성을 띠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가족이 없다. 어원으로만 따지자면 그렇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줄곧 고향을 떠나 혼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가 속하고자 하는 공간은 고향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때론 인생의 절반, 어쩌면 대부분의 시간을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헛헛함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헛헛함을 달래고자 고향보단 타지에서, 가족보단 친구나 애인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나누겠지만,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고 자기 체면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내 욕심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는데, 한두 달 가까이 고향에 내려가지 못할 때가 유독 그랬다. - 슬프게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 5월은 뭔 날들이 그리도 많은지 …… 가족과 함께 지내란 합법적 공휴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쁘단 핑계로 부모님께 제대로 된 안부를 전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에서야 이 말을 떠올려 본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내가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머무는 이들이 가족밖에 더 있겠냐는 먼 미래의 확신까지 끌고 온 채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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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을 하기를요. 사랑한단 말을 하게 되기를요. 아직 해본 적이 없거든요. 장난처럼 흘려넘긴 적은 있죠. 그건 우물거려 들리지 않거나 머뭇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에요. 상대방이 알아서 직감으로 느낄 뿐이죠. 마치 귀를 막아도 사랑이란 단어를 입 모양만 보고 무슨 말인지 맞출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러니 해본 게 아닙니다. 저한테 사랑이란 말은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고 그렇게 듣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아직 눈을 마주치거나 손을 잡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참 이상해요. 가족을 좋아하는데요. 사랑하는데요. 말하는 게, 가족에겐 어려울까요. 얼마나 놓쳐야 정신을 차릴까요.
그러고 보니 제 전화는 수시로 울립니다. 그중에서 하나는 알바 지원한 기업에서 온 연락이고요. 다른 하나는 신용카드 가입 권유하는 사람에게서 온 연락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엄마와 아빠입니다. 보통 전화는 용건이 있어 하잖아요. 저도 용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요. 용건이 없습니다. 그냥 합니다. 그저 저에게요. 제가 받으면 엄마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묻습니다. 뭐하냐? 아빠도 이와 비슷합니다. 저에게 질문을 하거든요. 밥 먹었어? 네, 그게 다입니다. 매일 매번 저에게 그래요.
내가 자각해야 호흡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자각하지 않아도 호흡은 작용합니다. 즉 당연한 일이기에 더욱 의식하기 힘듭니다. 저에게 사랑은 그런 호흡처럼 존재해왔어요.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제가 모르는 사이에요. 뭐하냐는 다소 싱거운 말은, 밥 먹었냐는 가벼운 인사는 모두 사랑해로 치환되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해는 여러 언어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이 당연하다는 게 믿겨 지나요? 나를 계속 당연하게 사랑한다니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저는 앞으로도 사랑은 완벽하진 않아도 완전하다고 믿으려고요. 저는 부모님에게 용건이 있을 때 전화를 합니다. 지금 어디냐고 물으려고요. 평상시에 집에 있던 사람이 없으면 걱정되거든요. 앞으로도 저는 그러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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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꿈을 자주 꾸진 않습니다. 밤샘을 많이 해서 ‘가성비 좋은’ 잠을 청해야 하는 탓도 있고,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냥 안 꾼 셈 치는 탓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몇 개 있습니다.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머리가 아프고 두렵고 일어나자마자 숨을 몰아 쉬어야 해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요. 꿈 속의 생태계는 별 것 아닌 것에도 가슴 졸이게 되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왜 그런 일에 힘들었지? 생각해보면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미로가 어떻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문 열고 나오는 방이 뭐가 무서웠을까? 땀을 흘리고 울면서 잠에서 깨진 않았어요. 최근에 기억에 남은 꿈을 소개하려고요.
기차가 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고요, 열차 안은 고요합니다. 바퀴가 소음을 내는 쿵, 쿵, 쿵 소리를 제외하면요. 할 일은 휴대폰을 멍하니 들여다 보는 일 밖에 없어서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을 멍하니 들여다 봅니다. 이런 말이 나와요. ‘나는 아빠가 죽은 그 순간에 울지 않았다. 이마가 힘없이 부딪힐 때마다 나무 울리는 소리가 난다. 울지 않고 아빠를 보내주는 게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주인공은 아빠를 열심히 죽이는 중인데, 내 뒤로는 아빠가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무서운 눈으로 나를 바라봐요.
“너 뭐 쓰냐?”
숨이 턱 막힙니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인데, 그러니까, 소설일 뿐인데요. 나는 실컷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다가 잠에서 깹니다. 말하겠죠. 정말 무서운 꿈이었어. 이 무서운 꿈이 내 건방지고 무서운 생각에서 온 것일까봐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밉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꿈을 꿀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는데, 변명하게 됩니다. 꿈 속의 소설, 아주 깊은 곳에서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 잠에서 깨서 다 잊어버리는 것. 그걸 잊어버리기 전에 이 지면에 적어버린 무시무시한 권력. 고작 가족이 되어서 휘두르는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알고 있어서,
아마 이 꿈을 오늘도 꿀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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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네요. 오월은 왠지 5월이 아닌 오월로 쓰고 싶어져요. 동그란 글자가 연속되는 것이 마치 굴러가고 있는 느낌을 주어서 그런 것 같아요. 오월은 기념하는 날이 많은 달이기도 하죠? 근로자의 날부터 시작해서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누구의 날’을 기념하는 기념일들이 참 많은 오월에는 그래서 생각하게 되기도 해요. 나는 어느 날에 속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근로자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어린이일 순 있을 거예요. 어버이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어린이일 순 있겠죠? 누군가의 스승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어린이일 수는 있으니까요.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날에는 속할 수 있을 거예요. 어린이의 마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린이로 불릴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 존재 자체로 축하받는 기념일은 어린이 날 뿐인 것 같지 않나요? 근로자는 일을 하기 때문에, 어버이는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승의 날은 제자를 가르치기 때문이라면 어린이는 그저 어린이이기 때문에 가능하잖아요! 어린이라는 존재의 강력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어린이였고, 여전히 어린이이고, 그래서 축하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요.
오월의 어린이 날. 무언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시간을 보여주는 듯 해요. 자라나는 것이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계절인 것처럼, 어린이의 성장은 무서울 정도로 선연하니까요. 앞으로 나무들은 더 커질 테고, 꽃과 풀은 비 한 번에 한 뼘씩 자라날 거예요. 그렇다면 어린이들은 얼마나 자라날까요. 우리들은 얼마나 성장할까요.
아마 오월이 될 때까지의 시간동안 축적되어온 마음이 이제는 분출되기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때로는 장마처럼 축축하게, 때로는 뙤약볕처럼 뜨겁다 못해 녹아내리게, 그러다 때로는 찬바람이 일고, 눈이 내릴 수도 있겠죠. 아무튼 지금은 분출해야 하고, 되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기억해요. 우리의 마음도 계절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요. 나무처럼, 아이처럼.
저도 조금 더 빨갛게 익은 뒤, 다시 찾아올게요. 그때까지 모두 안녕!
늦은 새벽에, 보리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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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흔히 말하는 K-장녀입니다. 근데 여기에 동생이 셋이나 있는! 하지만 장녀라서, 맏이라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원래부터가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어릴 적부터 학교에 다녀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을 씻고, 숙제를 하고, 놀고, 씻고. 늦잠 자지 않게 일찍 잠드는 게 당연한 어린이였거든요. 무던한 성격이라 동생들을 돌보는 일 또한 ‘내게 주어진 당연한 일’ 이라고 생각했어요. 동생들이 대들거나 반항할 때는 억울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이 있어서 행복한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우리는 매일 잠자리를 정하는 달리기 시합을 했어요. 원하는 곳에서 자려면 거실에서부터 빨리 달려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했죠. 그걸 달리기로 정하는 것이, 우리끼린 나름 공정하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결과는 늘 비슷비슷했어요. 셋째가 벽 쪽에 눕고 둘째가 가운데, 제가 맨 끝에 누웠어요. 맨 끝자리는 책상 바로 옆이라서 굉장히 무서워요. 밤에 눈을 뜨면 그 아래 귀신이 앉아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대부분 거기서 잤답니다. 달리기를 못한 게 아니라, 양보한 거예요. 둘째인 남동생은 어릴 때 겁이 정말 많았고 그렇다고 (그 당시에는) 막내였던 셋째를 무서운 곳에 재울 순 없었으니까요. 동생들은 이렇게 깊은 제 뜻이 있었다는 걸 알려나 모르겠어요.
자리에 누워서는 바로 잠들지 않고 얘기를 아주 많이 했어요. 안방에서 자는 엄마아빠가 시끄럽다고 찾아올 만큼이요.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건 생각이 나요. 잡은 손에 힘을 한 번 주면 잠들었냐고 묻는 거고요, 두 번 주면 건너편 사람이 자는 지 확인해 달란 뜻이었어요. 이것 말고도 우리는 우리만의 규칙이나 암호를 많이 만들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훌쩍 커버린 지금은 옛날 기억들이 아득해졌지만,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면 몹시 반가운 마음이 들어요. 우리 이랬던 거 기억나? 하고요. 그럼 늦둥이로 태어난 현재의 진짜 막내, 넷째가 흥미로운 눈으로 우릴 바라보죠. 그럴 땐 막내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해요. 언니, 오빠와 어릴 적을 함께 보냈다면 막내도 정말 재밌어 했을 것 같거든요.
여러분은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잠든 적이 있나요? 손을 잡고 자면 은근히 불편한 점들이 많아요. 잡은 손이 축축하고 뜨거워지면 잠이 잘 안 오고, 가끔은 손목이 저리기도 해요. 하지만 그 시절 저와 동생들은 손을 잡아야만 잠들 수 있었어요. 컴컴한 책상 밑을 보고서도 잠에 들으려면, 누가 먼저 잠에 들더라도 무섭지 않으려면. 그렇게 맞잡은 어린 동생들의 손은 작고, 부드럽고, 따뜻했어요. 그래서 혼자 잠드는 게 당연해진 요즘은 가끔 그 온도가 생각나기도 해요. 한 번 쥐면 자고 있냐고 물을 수 있는 비밀 신호도 보내고 싶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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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야기가 모두 마무리 되었어요. 리안이 바라본 가족, 어떻게 읽으셨나요?
우리는 가족처럼 서로를 보듬을 수 있을까요?
다음 호의 주제는 노력입니다. 기대하며 기다려주세요❤️
리안에게 보탤 의견이 있다면, 하단의 메일로 피드백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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